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독신과 결혼 가정관 === 앞서 루터보다 아내가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루터는 원래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는 어쨋건 신부로 살아오며 오랜 [[독신]]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있었고, 둘째로 자신이 황제와 [[가톨릭]]의 원수가 되어 살해협박을 받는 상황에서 가족을 만들 경우 피해를 줄 수 있는데다, 셋째 종교개혁 열기가 자신의 결혼으로 수그러들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종자들은 매우 반대했고, 추종자이자 동료교수이며 루터에 이어 오른팔이라 할 만한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결혼을 극구 반대해서 결혼식에 초대받지도 못 했다.[* 루터의 지지자들 중 사제 출신들은 대부분 루터보다 빨리 결혼했다. 문제는 당시 농민전쟁 중이었는데 농민전쟁을 이끌던 토마스 뮌처가 2년 전 16세의 전직 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때문에 가톨릭 측에서는 루터가 뮌처를 따라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결혼 당시 적어도 추종자들이나 지적 동료들 중에선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아버지만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덩실덩실 좋아했다고. [[독신]]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첫 번째론 '''태어나면서 [[고자]]'''인 경우, 2번째론 [[하나님]]에게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 즉 선지자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처럼 소명을 받은 경우에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나머지는 사탄적 독신 생활로 [[출생주의|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전 [[가톨릭]]도 유럽 전역에서 정착되기 전의 초기에는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중세 초기에까지 기혼자를 [[주교]]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후 그 당시 역대 많은 [[교황]]을 포함하여[* [[르네상스]] 때만 그랬다는 주장과 [[알렉산데르 6세]] 시절만 유독 심했다는 쉴드글들이 간간히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보다 덜한 것은 아니다. 10세기 창부정치 시기 교황 [[요한 12세]]는 [[충혜왕]]이나 [[해릉왕]]급이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식자층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여 비판이 심해진 것이다.]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애인을 두고 방종한 성생활을 즐기던 추세[* 다만 성직자의 성적 방종이나 축재는, 당시 교회에서도 떳떳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결격 사유는 아니었다. 대놓고 첩을 두고 사생아를 낳는 경우도 있었지만, 점잖게(?) 가정부를 집에 고용하는 정도(물론 정체는 모두가 알지만 묵인)도 있었고, 사생아의 경우 공식적으론 '조카'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 경우 모친의 가문의 성씨와 성직자의 개인적 재산은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한편 개신교 측 [[츠빙글리]]조차 과부와 동거하다 아이를 낳기 직전에야 비밀결혼을 인정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당시의 성직자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관대했다.]였기에, 루터는 "[[출생주의|결혼을 안 하면 죄를 짓는다]]"는 현실적 비판을 통해 결혼을 정당화했다. 여자의 경우는 독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결혼하지 않으면 육욕 때문에 '''반드시 죄를 짓는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의학 지식은 19세기까지 체액설이 주류였으며, 여자는 남자보다 체액이 많아서 배출해주지 않으면 [[자궁]]에 즙이 쌓이고 위로 올라와서 [[히스테리]]가 발작한다고 봤다. * 한편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까지의 [[수녀원]]을 여성학계에서는 큰 의미를 두기도 한다. 물론 현대 페미니즘적 의미의 여성해방은 아니다. 루터의 아내처럼 아동기에 보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유는 [[고아]]거나, 가난한 집에서 입을 덜거나,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서는 시집보낼 [[지참금]]을 아끼기 위해서 등.] 독신서약 또한 10대 초반에 자의와 상관없이 강압에 따라 하는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 여성학계에서 중세 수녀원을 주목하는 이유는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서 의의에 있으며, 실제로 19세기까지도 가톨릭의 수녀원 문화를 비판하는 주요 논거가 '가부장적 질서'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유주의 노선의 신문과 잡지는 가톨릭 신자들을 (자유로운 양심을 가진 남성 납세자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 세계와 반대되는) 비굴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반교권적 이미지로 가득한 동물우화집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주의 잡지에 실린 풍자화 중에는 교활하고 마른 [[예수회]]원과 호색하고 살찐 [[사제]]들 그림이 많았다.(성직자의 [[수단(의복)|새까만 옷]]은 만화가들이 기교를 부리기 쉬운 대상이었다). 이런 그림은 교구사제가 고해성사를 맡는 걸 비난하거나 [[수녀]]들의 성적 예의범절을 의문시함으로써 가부장적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표현했다. 새로운 가톨릭 질서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사제의 독신(혹은 비독신) 생활에 대한 그들의 호색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반가톨릭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할 '남성성'에 대한 (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집착을 드러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결혼의 경우 [[가톨릭]]의 [[7성사]]를 1519년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다가 곧 1520년 입장을 바꿨다.[* 1516년 [[에라스뮈스]]의 [[헬라어]] 신약성서의 견해도 수용했는데, 혼인이 성사라고 번역된 불가타 판이 오역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루터도 이런 선배 학자의 연구를 기쁘게(?) 사용했다.] 남녀의 교합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세속적인 영역이지 영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논리다. [[혼인성사]]를 교회에서 성사를 받는다고 해서 죄가 씻기는 것도 아니고, 그 혼인 중에 죄를 짓지 않는 자도 없다는 논리도 있었다. 혼인은 성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일부러 집에서 결혼했다. 혼인은 부모의 허락을 꼭 받으라고 주장했는데, 부모 또한 자녀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거나 자녀가 원하는 결혼을 막지 말 것도 같이 권했다. 부모가 아들이 많을 경우 분할상속을 꺼려서 혹은 딸일 경우 [[지참금]]이 아까워서 수도원에 보내거나 하는 짓은 중죄라고 선언했다. 이 경우 남녀는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을 해야만 한다. 기존의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달리 이혼[*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몇 가지 경우에 '혼인무효'는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사회에서 최초로 이혼이 가능함을 주장한 셈인데, [[간통]]의 경우 구약에서 율법으로 돌로 때려죽이라고 되어 있는데(죽이자는 건 아니고) 간통한 자는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이오, 이혼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단 습관적이며 의도적이고 공공연한 간통이 아닌 경우에는, 간통을 하더라도 이혼보다는 화해를 권고했다. 이 부분에서는 남녀 모두 동일했다. 남편이 [[고자]]일 경우에도 여자가 능동적으로 이혼 청구가 가능하다고 봤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여성 최대의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라서 고자가 이혼을 거부하면 남편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닌 '''동거인'''일 뿐이며, 아내는 비밀리에 [[NTR|'''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서''']][* 가능하면 남편의 형제나 사촌] 남편의 이름으로 키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LW 36:103'') (1520)]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 다른 개신교 신학자들과 다른 루터 고유의 의견으로, "이혼보다 [[중혼]]이 낫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 되었다. 이외에도 배우자를 유기하거나, 배우자의 생명에 대한 적개심, 악의적 기만, 결혼 전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를 발견하거나 혼인 후 다른 자의 아이를 밴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19세기 [[영국]]의 상대적 윤리주의자들에게서도 재평가받기도 했다. 자식의 경우 [[출생주의|다산을 강조했고]], 남성의 경우 20세, 여성은 16~18세에 결혼하여 닥치고 많이 낳는 걸 권했다. 16세기는 [[독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고, 한편으론 전근대 영아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 본인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루터는 "가정 일은 캐테의 뜻을 따랐고, 다른 모든 일은 [[성령]]을 따랐다"고 했다. 다른 남자들에게도 가정 일에 대해선 아내한테 많이 위임하라고 권유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은 검소하고 절약하고 짜내(?)는데 남자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자신이 40년간 학생과 [[수도자]]로 학자로 살아와서 세속의 일에 무지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루터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다루길 바랐다. 어릴 적 [[호두]] 하나를 몰래 먹었다가 부모로부터 등짝에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당했고, 학창시절에도 중등교육을 받던 시절은 물론 대학에서도 [[기숙사]] [[사감]]들에게 몽둥이질 권한이 있을 정도로 체벌이 곧 교육이던 시절이었는데, 훗날 루터는 자식교육에는 체벌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어린이들의 체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어느 정도 크기 전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정을 붙이지 않았는데, 루터는 늦게 얻은 자녀들을 애지중지 했다. 루터가 여행 중에 4살짜리 아들 한스에게 보낸 편지가 훗날 독일 교과서에 오래 실리기도 했고 어린이들이야말로 신앙생활에 모범이라 생각하여 이런 글도 남겼다. >어린이들은 어릿광대이자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어린이들은 매우 진실되고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들은 순수하고 순박하게 살아간다. 믿음에서 우리 늙은 바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논쟁이나 의심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믿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영생이리라.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돈을 세는 것보다 버찌 먹는 것을 좋아하며, 금화를 쌓아놓는 것보다 아름다운 사과 먹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곡물 값이 얼마냐 묻지 않고, 진심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성서나 속담이 우리에게 "어린이가 많을수록 더 많은 행복이 있다"고 말해주는 바와 같이 어린이에게는 세상에 물들기 이전의 소박한 모습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